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자기계발

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반란의 배경과 역사 이야기

by lit 2022. 12. 30.

역사에 기록된 스파르타쿠스

㉠ 배경1 : 로마의 노예

  • 로마는 기원전 264년부터 120년간 벌였던 포에니 전쟁 이후 외국인 노예들이 급증했습니다.
  • 그로 인해 로마에 흡수된 속주에 대규모 농장인 라티푼디움을 경영할 수 있었습니다.
    ※ 속주 : 이탈리아반도 이외의 로마 영토
  • 그러다 보니 소규모 농업의 주축인 자영농이 몰락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하게 됩니다.
  • 당시 로마는 전체 인구의 1/3이 노예였습니다.
  • 로마에서 노예는 그리스 어나 웅변술을 가르치는 교사 노예, 의사, 건축가, 조각가, 음악, 춤, 요리, 유모 등과 같이 다양한 분야에 분포되어 있었습니다.
  • 로마인에게 노예는 재산이었고,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뽐내는 지표였습니다.
  • 더욱이 당시 로마의 정치가들은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는 방법으로써 검투사 경기를 자주 열었고 검투사 역할에 노예를 투입했습니다.
  • 시민들도 검투사 경기에 호응하여 오락거리로 삼았습니다.
  • 따라서 검투사를 양성하는 사업은 떼돈을 벌었습니다.
  • 로마인들에게 노예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가축이나 다름없었습니다.

 

 

 

㉡ 배경2 : 노예의 반란

  • 기원전 240년경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시칠리아섬은 대량의 밀을 생산하던 로마의 곡창지대였습니다.
  • 이 섬에서 생산한 막대한 밀이 로마 자영농의 몰락을 가져왔을 정도였습니다.
  • 그만큼 시칠리아섬이 로마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났는데 이곳에서 노예들을 중심으로 무려 두 차례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.
  •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지만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시칠리아 대농장의 노예들에 대한 가혹한 억압과 노동이었습니다.

 

 

 

㉢ 스파르타쿠스 노예 전쟁

  •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기원전 73년 이탈리아 본토 카푸아에서 3차 노예 전쟁이 일어납니다.
  • 대농장의 노예가 일으킨 1, 2차 노예 전쟁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검투사 노예가 일으킨 전쟁이었습니다.
  • 반란의 주도자인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딴 이 전쟁은 로마 전역을 뒤흔들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났었습니다.

 

  • 기원전 73년 어느 날 밤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한 무리의 검투사들이 울타리를 넘어 탈출했습니다.
  • 당시 집정관에 출마하려는 유명 정치가가 주최하는 검투사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습은 무척 힘들었습니다.
  • 게다가 포악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그들의 주인 렌툴루스 바티아테스는 경기 날이 가까워질수록 검투사들을 혹독하게 다뤘습니다.
  • 하지만 그럴수록 대부분의 검투사는 언제든 경기장에서 죽을 것이라는 공포감에 휩싸여 잠도 이루지 못했습니다.
  •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가 이제는 적이 되어 수많은 관객 앞에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도 그들을 괴롭혔습니다. 
  • 그러던 중 탈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얼떨결에 몇몇 검투사들이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.

 

 

 

  • 그들은 무기를 탈취하여 험준한 산맥을 따라 베수비오산으로 향했습니다.
  • 바위에는 포도 넝쿨이 덮여있었고, 정상에는 수목이 우거진데다가 중간에는 넓고 평탄한 지역까지 있어 숨기에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.
  • 탈출에 성공한 인원은 70여명이었습니다.
  • 그들은 트라키아의 유목민 출신인 스파르타쿠스와 크릭수스, 오이노마오스를 지도자로 뽑았습니다.
  • 그들 대부분이 게르만족이었지만 힘이 세고 용감하며 머리까지 비상한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.
  • 산 아래 농장을 습격하고 로마군과의 전투에서도 몇 차례 승리하게 되자 대농장에서 소문을 듣고 도망쳐 온 노예들과 몰락한 자영농들이 모여들었습니다.
  • 그들의 수는 곧 수천 명을 넘겼지만 로마 원로원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법무관인 클로디우스에게 3천 명의 진압군을 주어 토벌하도록 했습니다.

2편에서 이어집니다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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